사업을 하며 수많은 리스크를 관리한다고 자부했지만,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소액이라 치부하고 넘길 수도 있었으나, 부실한 업체에 당했다는 사실보다 내 판단의 기저에 있던 ‘조급함’이 더 뼈아팠다. 용역 대금을 온전히 반환받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복기한 몇 가지 전략적 교훈을 남겨둔다.

1. 권위의 오류: 화려한 레퍼런스라는 허상
리소스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내린 성급한 결정이 화근이었다. 포털 사이트의 뉴스 기사, 대표의 인물 등록 정보, 홈페이지를 가득 채운 대기업 로고들. 이 ‘권위의 상징’들이 내 이성적인 판단을 흐렸다.
검증되지 않은 레퍼런스는 정교하게 기획된 마케팅 산출물일 뿐이다. 뒤늦게 확인한 그들의 고객사 명단에는 실체 없는 유령 회사가 태반이었고, 기사들은 비용만 지불하면 생성 가능한 보도자료였다. ‘바쁘다’는 핑계는 실사(Due Diligence)의 의무를 저버린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이었음을 인정한다.
2. 비정상적인 거래 조건과 소통의 결함
일반적인 B2B 거래의 관례(선금 30%, 잔금 70%)를 벗어나 100% 선금을 요구할 때, 나는 그 신호를 읽어냈어야 했다. 규모 있는 업체라는 착각이 경계심을 무너뜨렸고, 결국 50%의 선금을 지급하는 악수를 두었다.
메신저 단톡방의 풍경 또한 기이했다. 5명의 인원이 초대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인 소통은 대표와 CTO라 칭하는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인원들은 단 한 번의 리액션도, 읽음 표시도 남기지 않는 유령 계정들이었다. 조직의 체계가 아닌, 1인 혹은 소수가 연출하는 ‘규모의 연극’에 속고 있었던 셈이다.

3. ‘고추장 바른 생닭’을 받은 계약의 맹점
계약 후 일주일, 그들이 보낸 결과물은 참담했다. 우리가 제공한 샘플 데이터를 단순 복제한 수준이었다. 수정 요청 후 3주를 끌다 가져온 최종본 역시 수량과 퀄리티 면에서 상식 밖이었다.
이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양념치킨’을 주문했는데 ‘고추장 바른 생닭’을 받은 꼴이었다. 닭에 양념(고추장)을 발랐으니 계약 조건은 이행한 것 아니냐는 궤변. 계약서에 결과물의 구체적인 ‘정의’와 ‘검수 기준’을 명확히 기재하지 않은 허점을 그들은 정확히 파고들었다. 법적 대응을 하자니 비용과 시간이 용역비를 상회하는 구조, 그들은 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을 인질 삼아 나를 압박했다.
4. 압박의 기술: 상대의 리스크를 식별하라
내용증명조차 무시하던 그들의 태도가 변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포기하기 직전, 나는 그들의 다음 행보를 추적했고 대표가 강남에 새로운 요식업 사업장을 오픈한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법적인 공방보다 그들에게 더 치명적인 것은 ‘새로운 사업의 평판 리스크‘라는 것을 간파했다.

나는 조용히 단톡방에 마지막 메시지를 던졌다.
“강남 음식점 오픈 축하드립니다. 자주 지나는 길인데, 지인들과 함께 방문해서 회사 이름으로 외상을 달아두겠습니다. 곧 뵙죠.”
비즈니스 관계에서의 예우를 갖추되, 내가 당신의 ‘새로운 약점’을 쥐고 있음을 명확히 시사했다. 한 달 넘게 묵묵부답이던 대표에게서 5분 만에 연락이 왔고, 그날 오후 모든 금액은 환불 처리되었다.
Insights for Leaders
이번 경험을 통해 다시금 새긴 세 가지 비즈니스 원칙이다.
- 가시적인 지표를 불신하라: 뉴스 기사와 로고는 신뢰의 척도가 될 수 없다. 실제 프로젝트 포트폴리오의 실체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
- 계약서는 최악을 가정한다: 결과물은 최대한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불이행 시의 패널티를 명시해야 한다. ‘상식적인 퀄리티’는 계약서 위에서 아무런 힘이 없다.
- 협상의 지렛대를 찾아라: 법적 절차가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상대가 잃고 싶지 않은 ‘유형/무형의 자산’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 된다.
사업은 결국 리스크를 얼마나 정교하게 관리하느냐의 싸움이다. 이 기록이 누군가에게는 비싼 ‘레슨비’를 아껴주는 예방주사가 되길 바란다.